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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우슈비츠여

작가 권태명 조회수 286 추천수 0 등록일 2017-03-13

지역 : 폴란드 > 오폴스키


아!  아우슈비츠여…….

 

 

공포심과 탈진상태에서 우리는 진창길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의 집이라는 무덤에 이르렀다. 이 새로운 곳으로 끌려오면서, 그리고 한 모금의 신선한 공기를 맛보기도 전에 머리를 몽둥이로 맞아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된 사람도 있었다. 이는 수용소에 첫 발을 딛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환영행사의 시작일 뿐이었다. 수용소에 들어서면서 겁에 질린 우리들에게 그들은 이 것이 수용소생활의 맛이라고 했다. 혹독한 규칙만 있는 죽음의 수용소, 이곳은 살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절해고도다. 사람 살 곳이 아닌, 조만간 누구나 최후를 맞게 될 죽음의 저택이다.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가 해방된 후 발견된 잘멘 그래도프스키 라는 유대인이 남긴 쪽지에 적힌 글귀이다.

 

유대인 1,100명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독일 기업인 오스카 쉰들러 이야기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감독한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감독의 의도에 따라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몇 분 만을 제외한 3시간 분량을 흑백으로 처리한 영화는 오스카작품상과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한 수작이다. 영화의 내용이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평도 있지만 쉰들러 리스트는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쉰들러의 구출자명단에 올라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도 계속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굳은 표정으로 부부, 부자, 모녀,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산등성이에서 내려와 쉰들러의 묘석 위에 돌을 놓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런가 하면 영내에 거주한 수용소장이 이른 아침 베란다에서 조준경이 달린 총으로 먼 거리의 수감자를 심심풀이로 사살하고는 마치 과녁을 맞힌 듯 흐뭇해 하던 모습이나, 트럭에 실려 가스실로 향하던 어린이가 트럭에서 뛰어내려 막사로 달려가 숨을 곳을 찾아 헤매다숨을 곳을 찾지못해 끝내 화장실 오물 통으로 뛰어내려 안도해 하면서도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겁먹은 표정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전날부터 내리던 철 이른 비가 그 날 아침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로 시작되었다. 비가 그친 뒤의 청명한 하늘과 맑은 공기에 몸과 마음이 가뿐해졌다. 중부유럽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있는 폴란드는 높은 산이 거의 없다. 유럽 특유의 끝 없이 펼쳐지는 넓은 초원과 낮은 구릉 위로 서서히 번져가는 녹색 물결이 봄이 가까웠음을 감지케 했다. 본래 게르만족이 살았던 폴란드는 10세기경 폴라니에족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만들었다. 쇼팽을 비롯하여 노벨상을 두 번(물리, 화학상)이나 수상한 마리아 퀴리와 코페르니쿠스, 교황 요한바오로2세 등 인물들이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나라가 폴란드이다.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던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 전 날 묵었던 폴란드 고도 크라코프에서 서남쪽으로 60여km 떨어진 아우슈비츠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방도로로 들면서 차가 많아져 버스가 속력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소도로에서 지방도로로 내려서자 바로 도로변에 Oswiecim(오스비엥침)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나타났다. 세상에 알려진 악명 높은 Auschwitz(아우슈비츠)는 독일어 표기이고 Oswiecim은 폴란드어 이름이다. 이른 아침시간인데도 이미 여러 대의 관광버스가 수용소 앞 넓은 주차장을 거의 메웠다. 수용소가 소재한 아우슈비츠는 인구 43,000명인 도시이다. 8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아우슈비츠는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어 살았으며 ‘평화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그야말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시이름도 유대인들이 사용한 이디시(Yiddish)어로 ‘오슈피친(Oshpitzin)’이라고 불렸다. 솔라 강 가까이에 위치한 아우슈비츠에는 지금도 유대인의 시나고그와 옛 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누구나 알고 있을 이름 아우슈비츠. 인간도살, 대량학살, 인권의 완전 부정,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타인혐오, 문명과 휴머니즘의 완전파괴 등,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 하면 언제나 붙어 다니는 수식어이다.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정권수립 이듬해인 1933년 베를린에서 30여km 북쪽에 있는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에 첫 강제수용소를 설치했다. 오라니엔부르크수용소는 당시 일기 시작한 반 나치주의자를 구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독일내의 강제수용소는 계속 늘어나는 한 편 구금 대상도 정치범 외에 부랑자, 노동기피자, 동성애자, 알코올중독자 등으로 범위가 확대되었으며 1938년부터는 유대인을 반사회분자로 규정하고 구금대상에 포함시켰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한 히틀러는 1940년 5월 아우슈비츠에, 그리고 이듬해인 1941년 10월에는 아우슈비츠 옆에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Birkenau)수용소를 증설했다. 아우슈비츠에 강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지정학적으로 아우슈비츠가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데다 철도접속이 쉽고 탄광과 석회산지가 인접해 있으며 넓은 지역이어서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의 생산과 이동이 적합한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나치정부의 아리안인종 지상주의선전이 점차 강해지면서 타 인종의 독일 입국을 금지시키고 또한 독일 내의 수용소를 축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난 것도 폴란드에 대규모강제수용소를 건설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연 붉은색 기와로 지붕을 이운 아우슈비츠는 첫 동에 들어가 길게 뻗은 수용소 특유의 시멘트 통로에 올라서는 순간 오싹하는 한기가 느껴졌다. 크게 확대시킨 당시의 흑백사진이 회 칠한 흰 벽에 나란히 걸려있었다. 첫 입소자 들이 줄지어 나치친위대의사 앞을 지나가면 의사가 손가락 하나로 오른 쪽 왼 쪽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지시대로 가면 한 길은 가스실로 직행, 바로 한 줌의 재가 되고 다른 한 길은 수용소로 가 죽을 날을 세어가며 중노동에 시달리는 운명이 이어진다. 가스실로 가는 행렬은 노인, 환자, 임산부, 어린이 등 당장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가스실 직행자는 보통 입소자의 70-75%를 차지했으며 그 비율은 날이 갈수록 점점 높아졌고 어떤 때는 수용시설 부족으로 전원이 입소 즉시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바로 가스실로 직행한 경우도 많았다. 수용자가 가장 많을 때는 아우슈비츠수용소 만도 14만 명선에 이르렀다. 아우슈비츠 인근의 비르케나우와 모노비츠 등 3개의 수용소의 수용가능 수를 훨씬 넘어섰다. 유대인만도 1943년 1-3월 사이에 105,000명, 1944년 4-11월까지 585,000여 명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이들을 모두 받아들일 공간이 없어 하루에 20,000명 이상 가스실로 보낸 적도 있었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대학살을 말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1978년 미국의 NBC TV가 방영한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의 실태를 다룬 ‘Holocaust-전쟁과 가족’이라는 시리즈 물이 화제가 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소나 양 등을 태워 여호와(Jehovah, 또는 Yahweh)께 바치고 죄 사함을 받는 유대교의 제사인 번제(燔祭)를 의미했다. Holocaust는 히브리어로는 올라(olah)에 해당되지만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대량학살의 경우는 참사를 의미하는 ‘쇼아(Shoah)’가 적절한 표현으로 보고 있다.  

 

관람이 진행되면서 잔인하고 참혹했던 장면은 점점 그 도가 더해감을 느끼게 되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많은 사람들과 줄지어 수용소문을 들어선 어린아이는 마치 소풍이라도 나선 듯 사방을 두리 번 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사진에 나온 이 아이도 잠시 뒤에 가스실로 직행했음이 틀림 없을 것이다. 키가 120cm 이하인 어린이는 형식적인 심사도 거치지 않고 인솔교사와 함께 바로 가스실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명단에 등록된 수용자들 중 반 이상이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으로, 거기에 구타와 온갖 질병으로 서서히 생명의 끈을 놓아야 했고 죽기 직전 더러는 생체실험대상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나치는 특히 유대인의 근원적인 멸절대책으로 유대인여자들의 불임수술을 대량으로 실시했다. 수용자들에게 배급된 하루 식사량은 아침이 커피라고 불린 500cc분량의 탁한 색의 음료에 점심은 건더기가 거의 없는 수프, 그리고 저녁은 300g짜리 검은 빵과 3g의 마가린이 전부였다. 수용자들의 노동은 오전에 구덩이를 파고 오후에 다시 메우는 징벌적인 노동을 비롯하여 전쟁수행에 필요한 자재와 병기를 생산하는 노동, 사망한 수용자의 시체를 처리하는 노동, 그리고 수용자를 감시하는 일 등이었다.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 뒤에 작가가 된 프리모 레비(Primo Levi)라는 수감자는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수용소를 들어서는 순간 인간성의 파괴와 인간에 대한 극도의 모욕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까지 이르렀으며 그 보다 더 참혹한 인간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상실되고 절망만이 남게 된 것이다. 수용자들의 노동으로 군수공장을 비롯한 독일의 많은 회사와 나치친위대조직(SS)은 막대한 이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수용소 입소 후 가지고 간 모든 휴대품을 즉시 압수당했으며 노동가능으로 분류된 수용자들은 상반신 사진촬영을 마친 후 왼팔에 지울 수 없는 문신으로 수감자번호를 받았다. 지금도 이 문신을 지닌 체 살아가는 생존자가 있다고 한다. 이들의 문신을 보여주는 큰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한 세로 줄 무늬의 땀에 절은 빛 바랜 푸른 수용자 옷이 유리창 너머 벽에 소중하게 가지런히 걸려있다. 그 옷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어가며 입었다가 죽어 갔을 까. 복도를 메운 관람객들은 모두가 말을 잊었다. 시멘트 바닥에 지푸라기를 얇게 깐 3단 벽돌침대는 소 외양간만도 못하고 세탁이라곤 한 번도 하지 않은 듯 울룩불룩 튀어 오른 더러운 매트리스며 종이 한 장 가린 것 없이 변기를 나란히 이어놓은 화장실 등. 사람이 살았던 공간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범죄의 증거물’이라는 표지판이 부착된 건물에 들어서 눈 앞에 전개된 장면을 보는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순간적으로 아….하는 탄식을 합창했다. 마치 실을 뽑기 위해 쌓아 둔 양털 같은 사람의 머리카락, 각양각색의 찌그러진 수많은 신발,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이름과 주소가 선명한 가방과 바구니더미, 머리털로 짠 카펫, 알 빠진 안경테 무더기, 그리고 가족사진, 지폐와 동전, 우산, 칫솔, 면도용 솔, 빗 등등….. 이 물건의 소유자들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 까. 도대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 간 사람들이 뭣 하러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갔을까. 나치는 처음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수용소로 강제이동 시킬 때 새로운 정착지와 안정된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며 10-50kg 정도의 물건을 휴대하도록 속여서 데려왔다. 기록에 의하면 이 곳에 보존돼있는 유태인의 소지품은 40입방m의 신발을 비롯하여 7,000kg의 인모, 40입방m의 포크와 나이프, 3,500개의 가방, 36,000개의 냄비와 프라이팬 그리고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신변 잡품이 포함돼있다.   

 

복도 벽에는 수용소에서 사망한 많은 사람의 사진이 가지런히 부착돼있다. 사진 아래에는 이들이 수용소에 들어 온 날자와 생년월일, 사망일자 등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같은 동에 수용되었다가 함께 죽어 간 아버지와 아들의 기막히게 서글픈 운명도 있다. 사진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똑 같았다. 인간의 웃는 표정은 천차만별이지만 공포에 질린 모습은 누구나 같음을 알게 해 주었다. 초점 잃은 커다란 동공에 얼이 나가 의식활동이 완전히 멈추어 버린 허망한 얼굴.    

 

대량학살용 독가스 자이클론-B(Zyklon-B)를 개발한 하버박사는 공교롭게도 태어난 독일에 대해 유난히도 강한 애국심을 가졌던 유대 계 독일인이었다. 그가 자이클론-B를 개발한 목적이 처음부터 사람의 생명을 해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물질이 금방 동족 유대인의 대량학살 무기로 사용되었고 이를 본 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스위스로 망명했으나 엄청난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 계 영국인으로 태어나 아세톤제조방법을 개발해 폭약 성능을 향상시켜 2차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한 와이즈만 박사는 독립된 이스라엘의 초대대통령이 되어 조국을 위한 생애 마지막 봉사의 영광을 누렸다.    

 

아기 분유 통 만한 독가스 저장용기 수 백 개가 쌓여있는 옆에 연 푸른색을 띈 콩알만한 크기의 납작한 자이클론-B가 전시돼있고 그 옆에 뚜껑을 뗀 독가스용기가 마치 당장이라도 죽음의 연기를 뿜어낼 듯 악마의 목구멍을 크게 벌리고 있다. 그 한 통으로 순식간에 400여명의 명줄을 끊었다. 나치친위대는 유대인수용자들에게 목욕과 소독을 시켜준다며 옷을 벗기고 가스실로 들여보냈다. 친위대원들은 수감자들과 함께 가스실로 들어가 그들을 안심시킨 후 가스를 주입하기 직전 밖으로 나와 문을 잠그고 가스를 뿌렸다. 고통의 아우성은 2분 후면 잠잠해졌다. 30여 분 뒤 아무런 상처도 없는 시체를 꺼내 소각로로 보냈다. 가스실은 32분에 800여 명을 처형했다.      

 

‘죽음의 동’인 21동은 그렇잖아도 좁은 통로가 진행하기 힘들 정도로 관광객으로 꽉 찼다. 탈출을 시도하던가 외부로나 수용소내의 다른 사람들과 쪽지를 주고 받는 등 수용소규칙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엄한 추가 벌이 가해졌다. 총살에서부터 심한 매질과 중노동 후 빛 없는 사방 90cm의 좁은 방에 네 사람을 감금하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 굶기는 등의 참혹한 벌이 내려졌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탈출에 성공한 수감자가 100명에서 400명 선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엔 한 젊은이를 대신해 죽음의 길을 택한 막시밀리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신부의 슬프고도 숭고한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1941년 7월, 14동의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4시간이 지나기까지 추적에 실패하자 수용소규칙에 따라 같은 동의 수감자 중 10명이 아사형을 받게 되었다. 친위대원이 임의로 지명한 10명에 포함된 한 젊은이가 자기는 처와 어린 자식이 있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얼른 중년의 한 사람이 대신 벌을 받겠다고 나섰고 친위대원도 그의 요청을 받아드렸다. 이 사람이 바로 막시밀리언 콜베 신부이다. 

 

10명은 즉시 아사감방으로 이송되었다. 9명이 사망한 후 콜베신부만 남게 되었고 2주가 지나도 살아있자 나치친위대는 결국 독물주사로 그의 생을 마감시켰다. 그가 죽어간 감방에는 언제나 고운 꽃이 장식돼있었다.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콜베신부를 ‘사랑의 순교자’로 인정하고 성자로 시성(諡聖)했다. 죽음의 건물 21번 감방에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벽화가 하나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그림을 손톱으로 파서 그린 그림이다. 손톱으로 그 딱딱한 시멘트 벽을 얼마나 긁었으면 그렇게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생사의 경계선을 수 없이 넘나들었을 절체절명의 한계상황에서도 그가 지녔던 깊은 신앙심과 초능력에 숙연해질 뿐이었다.  

 

11동 안뜰의 총살처형장에는 담벼락에 검은 색의 두꺼운 방음재를 부착해 놓은 ‘죽음의 벽’이 있다. 조국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거나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된 수용자들과 수많은 무고한 수감자들이 이 곳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이곳에 끌려오는 수감자들은 대부분 동물이라도 견디기 어려울 지하감방에서 여러 달을 채소로만 연명을 해왔기 때문에 해골처럼 말랐고 똑바로 서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총살 직전 그들은 "폴란드여 영원 하라, 자유여 영원 하라"고 외친 후 눈을 감았다. 죽음의 벽 앞에는 한을 품고 죽어간 영혼을 위로하는 아름다운 꽃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는 유대인 외에도 소련군 포로와 집시들도 수용돼있었으나 유대인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유대인과 신티.로마(Sinti.Roma)로 불린 집시는 나치의 인종청소대상의 1순위에 올라있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소를 설치한 것은 이 곳이 유럽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전역으로부터 유대인들을 잡아 수송해오기가 용이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에 처음으로 폴란드 정치범과 폴란드거주 유대인 724명을 수용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부터는 유럽에 전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강제로 잡아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북쪽으로 노르웨이에서 남쪽으로 그리스에 이르는 아우슈비츠에서 2,500km정도 떨어진 먼 곳까지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철저하게 유대인사냥을 벌였다.

 

유럽 각국에 살고 있던 886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67%에 해당하는 593만여 명이 나치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이 593만여 명 중 110-150만 명이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치정부는 유대인의 피가 8분의 1만 섞이면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 가운데 폴란드에 거주한 약 300만 명의 유대인 중 90%가 살해됐으며 다음으로 소련, 헝가리, 루마니아,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벨기에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에 살았던 유대인이 뒤를 이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수용소가 해방될 때 살아남았던 유대인은 7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은 모두 극도로 영양실조에 이른 상태였다. 

 

나치는 이미 1942년 1월 라인하르트 헤이드리히 친위대장 주재회의에서 당시 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을 모두 청소할 비밀결의를 해 놓고 있었다. 히틀러는 아리안족 지상주의를 강조하면서 비 아리안족의 독일 입국을 금지시키는 한편 민주주의와 마르크시즘을 배격하고 특히 유대인 멸절을 선언했다. 나치에 대해 아무런 정치적 저항이 없었음에도 다만 유대인이라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대량학살의 화를 입은 유대인 말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데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1차 대전 후 배상금 지불문제로 독일이 곤경에 처해있을 당시 유대인들은 상업과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서였다는 설과 어릴 때 미술지망생이었던 히틀러가 두 번이나 미술학교입학시험에 낙방한 것이 당시 심사위원 중 다수를 차지한 유대인심사위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는 설, 그리고 히틀러의 어머니가 유대인과 재혼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증오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작용했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있지만 어느 것도 검증되지 않고 있다. 한편 유대인이면서 전혀 피해를 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알프스교향곡’을 작곡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정권에 협력한 공로로 본인은 물론 며느리와 손자까지 모두 화를 면했으며 유대인최대금융재벌인 로슈차일드가도 수용소를 비켜갔다.     

 

‘Arbeit macht frei’ 라는 슬로간이 메 달린 아우슈비츠수용소 정문의 휘어진 철근 아치는 앙상한 해골을 연상케 한다. 노동하면 자유롭게 된다는 이 슬로건은 본래 1940년 나치친위대가 강제 동원한 폴란드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폴란드병영이 있던 자리에 수용소를 세우면서 내걸었던 것이다. 수감자들은 이른 아침 일터로 나가 늦은 시각까지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은 자유는 커녕 죽음으로 가는 시간만 단축했을 뿐이었다. 철저하게 역설적인 이 슬로건은 가혹한 노동으로 죽은 뒤에라야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일 까. 정문의 철제 아치가 2009년 12월 18일 도난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틀 뒤에 5명의 절도범을 붙잡았지만 아치는 세 토막으로 잘려 있었다. 폴란드 당국은 이를 다시 용접하여 수용소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 정문에 걸린 아치는 복제품이다.  

 

넓이가 20ha인 아우슈비츠수용소에는 감방과 시체소각실, 그리고 수감자들의 유품 등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으나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는 패전 후 나치친위대가 철수하면서 기밀문서와 각종 증거물 등의 파기를 위해 건물을 대부분 폭파해버렸기 때문에 171ha에 이르는 수용소가 광활한 벌판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 몇 동의 수감자막사 외에 나치친위대초소와 감시 탑, 그리고 정문 등 건물 일부와 300여 개소의 폐허가 남아있다. 이밖에 14km에 이르는 철조망과 11km의 포장도로, 그리고 유대인수송을 위해 수용소 안까지 이어진 2.2km의 철도선로가 보존되어 있다.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가 어려워 ‘죽음의 문’ 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비르케나우수용소 정문에서 안으로 1km 넘게 길게 뻗어있는 세 가닥의 철도선로는 끝이 안보일 정도로 가물거리는 거리이다.    

 

비르케나우정문 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넓은 벌판에는 몇 개 남은 수용소건물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철조망 사이로 녹색 움이 돋기 시작했다. 누가 이 곳을 인류 최악의 인간도살장으로 기억할 것인 가. 잔혹한 역사의 현장이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어있다. 11시가 넘으면서 관광버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밀려들었다. 1947년 7월 2일 폴란드정부가 이곳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강제수용소를 박물관으로 지정했고 1979년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의 문화유산등록기준은 ‘현저하게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나 현존하는 전통, 사상, 신앙과 예술적, 문학적 작품, 그리고 이와 명백하게 관련 있는 것’이라고 규정되어있는데 아우슈비츠수용소는 이 규정에 해당되지 않으나 인류역사에서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될 비극의 증거로서 후세에 알려야 한다는 취지에서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에서 하나뿐인 ‘부(負)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의 유네스코문화유산지정을 계기로 폴란드정부는 아우슈비츠라는 명칭이 마치 폴란드당국이 건설한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고 해서 유네스코에 등록명칭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독일나치의 강제, 절멸수용소, 1940년-1945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1940-1945)’로 변경해주도록 요구했으며 유네스코는 2007년 6월 이를 받아들였다.   

 

이곡 권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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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로 연행된 유대인들이 살았던 유럽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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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수용소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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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 수용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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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개스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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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개스 자이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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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의 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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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발로 만든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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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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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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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족과 크러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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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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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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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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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 빗 등 각종 잡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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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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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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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끼 식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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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감동으로 가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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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움의 수감동을 보고 나오는 관광객들의 공포에 질린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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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베신부가 생을 마감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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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으로 그린 예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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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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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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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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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소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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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케나우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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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케나우수용소 감시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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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케나우수용소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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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을 싣고 간 열차의 종착역, 비르케나우수용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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