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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존경한 일본육사 동기생 호리구치씨 와의 만남

작가 권태명 조회수 714 추천수 0 등록일 2017-04-02

지역 : 일본 > 도쿄도 > 에도가와구



박정희를 존경한 일본육사 동기생 호리구치(堀口)씨와의 만남

 

 

 

대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여인이 나왔다. 금붕어 사진이 필요해서 찍으러 왔다며 명함을 건네자 잠간 기다리라며 마루로 올라가더니 노인 한 분을 모시고 나왔다. 육척의 훤칠한 키에 안광이 번득이는 노인의 자태가 범상찮게 느껴졌다. 말 없이 손짓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마루로 올라가 수인사(修人事)를 나누고 다시 방문 목적을 알렸다. 일본 출장 길에 편집부로부터 받은 부탁이었다. 내 말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따라오라며 앞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내해준 젊은 여인에게 맥주를 가져 오라며 말 없이 손짓 한후 딸이라고 했다. 그제야 노인의 굼뜬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말도 어눌하고. 수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맥주가 나오고 아침 9시 반부터 노인의 얘기가 시작됐다. 

 

 

우선 본인의 이름을 호리구치 도쿠지(堀口篤之)라고 밝힌 후 "귀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 동기입니다"라는 말로 운을 뗐다. 함께 간 일본인 지인 S씨와 나는 간간이 짧은 말로 끼어들었을 뿐 한 뜸도 주지 않고 태평양전쟁부터 한일관계와 시국얘기, 일본정치와 세상물정 등 온갖 분야를 넘나들며 노인의 얘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10시가 되자 밖에선 경매인의 빠른 목소리와 상인들의 왁지꺼하는 소리가 어우러져 시끌시끌했다. 한 장만 찍고 금방 오겠습니다며 일어서자 나중에 해도 된다며 손으로 앉으라고 했다. 세 번을 시도했으나 결국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30 여분 지나자 밖이 조용해졌다. 경매가 끝난 것이다. 12시 가까이 이르러 노인의 긴 얘기가 끝났다. 500cc짜리 캔 맥주를 술이 약한 나는 한 개, S씨는 3개, 노인은 4개를 비웠다. 모두가 벌개졌다. 25여년 전 어느 초가을 아침 일본의 한 금붕어양어장 주인 호리구치 노인을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이다.  

 

 

박정희에 대한 노인의 기억은 거울처럼 또렸했다.박정희와 함께 1942년에 육사에 입학한 노인은 57기이다. 입학때 학생이 몇 명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2년 뒤 1944년 4월 졸업생은 모두 1,268명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박정희를 회상하는 노인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입학 후 대대, 중대, 소대로 나뉘어지고 소대단위로 내무반이 정해지고도 조선인 학생이 있는 지는 전혀 몰랐어요. 우선 모두 일본 이름이었으니까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향이나 출신학교 등 개인적인 대화도 나누게 되면서 박정희가 조선출신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를 알고 난 후도 체구가 왜소한 편인데다 수줍은 성격인지 박정희는 좀처럼 말을 잘 하지 않아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본육사 입학자는 엘리트 의식이 높은데다 더욱이 식민지 나라에서 온 학생이라 좀 무시한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날이 지나면서 그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어요. 매사에 침착하고 예의 바르고 눈매가 매서운데다 나름대로 당당하고 자세에 흐트러짐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저 친구를 좀 사귀어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숨을 돌리느라 노인은 맥주를 만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태평양전쟁 중이던 당시 일본은 모든 물자가 달릴 때였습니다. 생도들에게 지금되는 피복이나 담요, 철모, 수통 등 보급품도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어서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관물정돈검사 때는 언제나 박정희가 1등이었습니다. 훈련에서도 군인에게 가장 기본이지만 생도들이 제일 싫어한 제식훈련에서 박정희는 단연 모범생이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그의 생각이나 처신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습니다. 온 갖 얘기를 다 하면서 인간적으로 친해졌습니다. 군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도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라며 다시 말을 잠시 멈췄다. 

 

 

딸에게 다시 맥주를 가져오라고 해 캔 두개가 더 들어왔다. 술 실력은 일흔이 넘었을 노인이 가장 강했다.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술을 좋아하는 젊은 S씨의 얼굴도 벌개졌다. 노인만 정정했다. 여기서 노인의 이야기를 잠시 끊고 관물정돈과 관련된 얘기를 하나 덧붙인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 대도시의 공장 등 일본의 생산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들 시설과 각종 설비를 복구하면서 일본인들은 군대의 관물정돈을 떠올렸다. 정리정돈(整理整頓).일본 말로‘세이리 세이톤’이다. 공장이든 사무실이든 작업에 필요한 부품이나 도구 등을 팔을 뻗으면 닫는 거리에 가지런하게 정리해두도록 정형화했다. 시간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 세이리 세이톤 운동이 공장의 생산성과 사무실의 업무능률을 크게 높였다. 40여년 전 한국도 품질관리운동을 전개할때 이 세이리 세이톤 이론을 도입했다.    

 

 

나를 보며 노인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박정희 같은 인물을 만난 한국은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당시 박정희 장군이 혁명에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의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가 비명에 쓰러지기 전 이런저런 얘기가 있었지만 난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2년 간의 짧은 교유(交遊)였지만 내 일생에서 그와의 만남이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일본과 맺은 국교정상화는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한국으로선 반일감정의 불길이 뜨겁던 시기였잖아요."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위대한 지도자의 참 모습은 눈 앞의 인기영합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혜안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에 진력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의 미래를 내다본 결단이 오늘의 한국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됐다고 봅니다. 5.16혁명 후 최고회의의장 때였던가 일본에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연락이 닿은 육사동기생 2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그와 만찬을 즐기며 회포를 푼적이 있었습이다. 감개무량했지요. 그 때 모인 옛 친구들에게 박정희는‘한국이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으니 앞으로 여러 분들이 힘을 보태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합디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회담에서 일본의 대 한국 보상액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였다. 이 금액은 그해 일본 외환보유액 18억달러의 28퍼센트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12시가 가까워지자 노인은 에피소드 하나를 밝히고 대화를 끝내겠다고 했다. "1944년 4월 육사 졸업후 박정희는 만주로 가고 나는 소대장으로 비르마(지금의 미얀마)전선에 배치되었습니다. 당시 싱가포르, 라오스, 비르마 등 인도지나 일대에 전투가 치열할 때였습니다. 실전경험 없이 최 전선으로 가게 돼 무척 겁이 났습니다. 일본을 떠난지 한 주간 넘어 전선에 도착해 숨돌릴 여유도 없이 바로 전투에 들어갔습니다. 며칠 후 미군의 공습으로 머리에 파편이 박혀 혼절하고 말았어요. 얼마 후 정신이 들었는데 어떤 젊은 녀석이 나를 어깨에 메고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동굴로 들어갔는데 그 병사가 내 소대에서 유일한 조선병사였습니다. 일본 병사들은 모두 도망간 겁니다.이 조선병사가 나를 내려놓고 뛰어나가더니 위생병을 데리고 왔어요. 나를 위생병에게 넘겨주고 조선병사는 어디론가로 갔어요. 그 게 그와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이름도 모른채 헤어진 겁니다. 난 후송되었고 내 생명의 은인인 그 젊은 이와는 이날까지 만나지 못하고 있읍니다. 당시 전선에서 전사한 병사들은 그대로 잊혀지는 경우가 많았어 요. 전쟁이 끝나고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한국 이름을 모르니 찾을 수가 없었어요. 오랫 동안 그 병사가 생각나 잠을 설칠 때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말을 끝내며 그는 나의 손을 잡아 상처입은 머리를 만져보게 했다. 아이 주먹 크기 만큼 함몰돼있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인도차이나 침공이 얼마나 무계획적이고 무모했던 가에 대해서는 일본현대사연구가 겸 이름 난 논픽션 작가인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가 쓴 昭和陸軍(소화육군)에 자세하게 묘사돼있다. 호사카씨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 6일 전인 1941년 8월1일 미국이 내린 대일본 석유수출금지조치를 구실삼아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함대를 기습공격하고 이어 인도차이나로 처들어갔습니다. 처음엔 일본의 전쟁 결행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명분과 전투에서 일본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이는 전쟁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大本營)의 참모들이 현지 사정을 전혀 모른 체 전쟁에 돌입함으로써 병력을 비롯한 무기와 탄약, 식량, 의약품, 전투복 등의 배치와 공급에 사전 계획이 전혀 없어 갈팡질팡했기 때문이다.이는 대본영이 병사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실제로 이 지역 전투에서 일본은 최 전방부대에 실탄을 제 때 공급하지 못해 대대 단위의 부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전멸당하다 싶이 한 경우가 허다했으며 병사를 사람이 아닌 무기질의 병기처럼 취급했다"며 대본영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일어설 시간이 돼 일어서면서 호리구치 노인에게 부상을 당했지만 육사 출신 엘리뜨가 어떻게 금붕어양어사업을 하게 됐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대로 내려온 가업이오. 당연히 물려받아 이어가야지요."했다. 노인은 "에도막부시대부터 상류층의 수요가 많아 에도에서 가까운 이 일대에 금붕어 양식업이 번창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취향이 바뀌고 따라서 수요가 크게 줄어 지금은 이 일대에는 우리 집과 다른 한 곳 등 두 집만 남아있을 뿐"이라며 앞 날을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5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의 금붕어문화의 맥이 단절되지 않도록 이어가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했다. 조용해진 밖으로 나와 수조에서 한가롭게 유영하는 금붕어 사진 몇 컷을 카메라에 담고 노인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후 서둘러 전차역으로 향했다. 도중에 S씨가 "아마 저 노인이 오랜 세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다 쏟아냈으니 오늘은 편하게 잘 잘겁니다. 일본사람에게 할 이야기도 아니고 마침 얘기를 나눌만한 한국인을 만난 김에 작심하고 다 털어놓은 것 같아요. 일본사람들은 초면인 사람에게 여간해서 개인적인 깊은 얘기를 하지 않음은 물론 더 더욱 외국인을 집 안으로 들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라고 했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10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제57기생으로 3학년에 입학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1942년도의 입학생은 1,268명. 이 가운데 조선유학생은 박정희를 포함해 모두 7명이었다. 김영수(金泳秀), 김호량(金鎬梁), 정상수(鄭祥秀), 박정희(朴正熙),이한림(李翰林),이섭준(李燮俊), 김재풍(金在豊).이 가운데 김영수는 필리핀전에서, 그리고 정상수는 오키나와전에서 전사했다.박정희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 때 혈서를 쓴 게 친일의 증거라고 문제라고 세상에 알려졌다.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한 1940년의 1년 전인 1939년 일본육사나 사병에 지원한 조선인 중 39명이 혈서를 썼고, 1940년에는 혈서제출 지원자가 무려 168명에 이르렀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의 입학자격 연령은 19세세 이하로 제한돼있었다. 입학지원서를 제출할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23세였다. 입학대상자의 자격을 넘은 나이였다. 입학원서와 함께 혈서를 제출한 것은 그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혈서 외에 박정희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됐지만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사에 입학한 이응준(李應俊), 김석원(金錫源), 채병덕(蔡秉德), 정일권(丁一權), 김정렬(金貞烈)등 대부분의 조선인 학생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박정희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입합할 때 조선에는 이미 전국적으로 창씨개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도 당시 일본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조선 청년들이 제출하는 혈서는 일종의 유행이었지 반드시 일본에 대한 충성심의 표시는 아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일본육사는 야망을 가진 조선 청년들의 마음을 끌었던 대상이었다. 19세기 세계 최강을 자랑했던 프러시아육군을 모델로 삼아 1885년에 개교된 일본육사는 당시 조선 청년들이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진 군사교육기관이었다.1941년 총리에 취임하여 태평양전쟁을 지휘한 도죠 히데키(東条英機)는 17기생이다. 17기에는 조선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다.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인 1938년3월3일 육군특별지원병령시행세칙(육군정령제11호)을 반포했으며 이어 4월2일 조선총독부가 이 세칙을 조선인에 대해서도 일본인과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이 법에 근거하여 조선인의 일본육사와 일본군 병사입대 지원이 시작됐다. 일본은 이어 같은 해 5월5일부터 조선에 대해서도 국가총동원법(소화13년칙령제316호)의 실시에 들어갔다. 비밀이 해제된 당시 일본내무성경보국보안과가 발행한 특고월보(特高月報)는 "병사의 경우 조선인의 자발적 지원자는 거의 없었으며 일본 경찰의 반 강제적인 권유에 의한 지원이었으며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기피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조선인에 대해 징병제 실시에 앞서 1939년 창씨개명법을 발표하고 1940년부터 우리나라 전국민에 대해 창씨개명을 강제로 추진했다. 창씨개명법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에 폐지됐다.일본이 강행한 창씨개명의 목적과 시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제령(制令)19호(創氏), 20호(改名)포고령을 반포, "본적지가 조선으로 돼있는 일본신민(臣民, 조선인을 지칭)에 대해 새롭게 氏를 만들고 名을 바꾼다"는 정책의 시행에 들어갔다. 창씨개명이다. 이 정책은 일본의 가족제도를 조선에 도입함으로써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게 확실했지만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총독부는 1940년 2월 창씨개명 실시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국 도지사회의를 열고 7월20일까지 전국에 걸쳐 창씨개명사업을 완료토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창씨개명한 조선인은 2월에 0.4%이던 것이 3월엔 1.5%, 4월 4%, 5월 12%, 6월 27%, 7월 53%, 그리고 목표월인 8월엔 80%에 이르렀다. 반 년 동안 무려 전국민의 80%가 창씨개명하여‘일본인’이 된 것이다. 

 

 

창씨개명은 모두 가족 단위로 시행되었다. 일본이 창씨개명을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였냐를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창씨개명 시행에 대해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교토대학 역사학교수는 그의’創氏改名の實施過程について(창씨개명의 실시과정에 대하여)’에서 "조선반도에서 불과 여섯 달 만에 80%의 국민이 창씨개명에 참여한 이유는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인허가문제를 비롯하여 각종 직업상 또는 자식들의 취학 등에 불이익을 준다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 창씨개명의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단속했기 때문에 이룩한 결과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또한 창씨개명시행 29년 앞인 1911년 11월1일 총독부령 제124호를 통해‘조선인의 성명개칭에 관한 건’을, 그리고 1923년엔 총독부령 제154호로 ‘조선호적령’을 반포함으로써 창씨개명을 위한 법적기반을 갖추었다. 創氏改名에서 氏는 성(姓)이며 名은 이름을 말한다. 성을 새로 만들고 이름은 바꾼다는 게 창씨개명이다. 창씨개명을 하면서도 많은 조선인은 성은 어쩔 수 없이 새로 만들었으나 경우에 따라서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되 일본식으로 불렀다. 이는 일본이 이름 보다는 성을 바꾸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金民主(김민주)인 경우 金은 金山(가네야마)나 가네다(金田), 또는 가네코(金子) 등으로 하되 民主는 그대로 사용하고 일본식 발음인 민슈로 불렀다. 

 

 

 

일본 육군당국은 조선 청년들의 일본육사 지원은 일본에 충성하기 보다는 일본의 선진 무력을 배워 장래 조선독립을 위한 혁명봉기 때 기여하려는 성향이 높았던 것으로 분석했다. 이같은 판단은 중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육사입학이 1기생(1890년 7월 졸업)부터 문호가 개방됐지만 조선인에 대해서는 11기부터 입학이 허용된 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일본내무성이 주요 정부시책을 밝히는 특고월보는 "조선인 입학허용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을 붙였다. 우선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평범한 가정출신에 민족주의나 공산주의운동에 관여하지 않으며 사상이 건전한 우수 인재에 촛점을 맞추었다. 이 기준에 적합한 대상자를 선발하여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졸업 후 가능한 한 사단사령부 등 상급부대의 작전이나 인사 등 주요부서에 배치하는 특혜를 주어 이들을 친일 세력으로 이용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의 이러한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몇 명을 제외하면 조선인 장교는 모두 종전 후 바로 귀국해버렸기 때문이다.

 

 

해방 후 6.25전쟁을 거쳐 5.16혁명에 이르는 기간 한국육군 고위층은 거의 대부분 만주국군 소속이거나 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들로 이루어졌다. 일본방위성 산하 방위연구소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를 포함해 조선인 일본육사 졸업생이 11기부터 61기까지 모두 144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초대 이응준부터 18대까지 육군참모총장은 모두 만주국군과 일본육사 출신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6.25전쟁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는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간성이었으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한 한국군의 주력을 이루었다. 일본육사 출신 중엔 대한제국 이왕가(李王家)의 후손이 몇 명 있다. 이들의 일본육사입교는 정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고종의 제7황자인 영친왕 이은(李垠)은 일본육군 중장까지 올랐으며 일본 황족에 준하는 전하(殿下)의 칭호를 받았다. 고종의 손자이며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李鍵)은 일본육사 42기로 중좌까지 올랐으며 일본에 귀화했다.이밖에 대한제국 군부대신임시서리시종무관장을 지낸 이병무(李秉武)는 한일합병 후 일본군으로 전적하여 중장에 올랐으나 고종양위와 대한제국군대의 해산을 주장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저지를 죄로 정미5적(丁未五賊)과 경술국적(庚戌國賊)에 포함되었다. 조선 양반가 출신으로 일본육사를 나온 홍사익(洪思翊)은 조선독립운동 참여를 거부하고 일본군에 전적하여 중장까지 올랐으나 태평양전쟁 전범자로 분류돼 마닐라군법회의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일본후생노동성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동원된 조선인은 군인 110,116명, 군속 110,043 명 등 모두 240,159명이며 이중 전사 또는 행방불명자는 군인 6,178명, 군속 16,004명 등 모두 22,18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전후 도쿄전범재판에서 129명의 조선인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이 가운데 14명은 B.C 급 전범자에 해당돼 사형에 처해졌다고 밝혔다. 현재 태평야전쟁에 동원되었던 21,000명의 조선인 전사자의 위패가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있다.

 

 

 

25여 년이 지난 최근 다시 호리구치 금붕어양어장을 찾았다. 도쿄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15km 정도의 거리인 도쿄도에도가와구하루에(東京都江戶區春江)마을. 전차로 30분 남짓 걸렸다. 짧은 일정에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볼 일이 있어 미리 들렀다 가야했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으나 기차와 택시를 몇 번이고 갈아탄 바람에 많은 시간을 뺐았겨 호리구치 댁에는 예정보다 1시간 반쯤 지난 6시 직전에 닿았다. 주변은 그림자 같은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시간대에 포함되지만 사실은 일본이 30분 빠르다. 택시를 내리고 보니 25년 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양어장 주변이 완전한 도심심로 바뀌어 있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다. 문을 두두리자 잠시 후 초로의 남자가가 문을 열었다. 수인사 후 25년 전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안으로 들어오라며 반갑게 반갑게 맞아주었다. 초면이라 어떨까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금붕어 그림에 호리구치 히데아키(堀口英明)이라고 적힌 명함을 받았다. 스무 평도 못될 초라한 집이었다. 짚 앞에 백여 평 남짓한 금붕어양어장에이 남아있고 주변에 숲이 무성했다. 120년 전인 1897년에 창업한 호리구치 금붕어양어장은 당시 일본3대금붕어양어장 꼽힐 만큼 유명해 일본 전역에서 금붕어를 사러 올 정도로 사업이 왕성했으나 지금은 시대가 너무 바꾸어 앞으로 얼마나 이어갈지 불안한 실정이라 했다. 한 마리에 우리 돈으로 100만원을 넘어서는 금붕어의 최고 귀족인 린킨(琉金)은 호리구치가의 개발 품종으로 지금도 인기가 높다고 했다.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안방이었다. 방이 좀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

껴졌다. 집이 너무 협소에 옆에 새로 지어 가재도구를 매일 조금씩 옮기는 중이라고 했다. 25년 전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당시 나와 대담한 부친으로부터 만나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며 두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과 최고회의 시절 일본에 잠시 들른 박정희 장군과 일본육사동기생 20여 명이 도쿄에서 만찬을 함께 했다는 사실을 부친으로부터 가끔 들었다며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부친이 그 이야기를 하며 무척 고무되어 기뺐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남은 유품이 있으면 시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이삿짐에 싸 새로 지은 집으로 보냈는데 아직 풀지를 않아 찾을 수가 없다며 마침 남아있는 부친의 액자사진과 전쟁당시 사용했던 수통 등 몇 가지를 내 놓았다. 뇌경색을 않다 세상을 떠난 부친이 남긴 2003년 무렵의 사진이라고 했다. 

 

 

 

아들은 부친에 비해 키도 작고 생김새도 호인형이었다. 부친은 수재였다며 부친은 본래 의사가 꿈이었으나 떠밀려 가업을 이어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본인이 즐겨 이어받은 분야는 아니었지만 가업의 책임을 맡고부터는 몸을 던져 사업을 확장하여 일본제1의 금붕어양어장을 일구었고 도쿄도담수어양식협동조합장도 지냈으며 농림수산대신상 외 유관기관으로부터 많은 상을 받는 등 일본금붕어문화에 큰 공적을 남겼다고 했다. 벽에 상장이 가듣 걸려있었다. 술을 좋아한다는 그는 가까운 곳에 좋은 술친구 한 분이 있는데 그가 재일한국인교포라며 이틀 걸러 한 번씩은 만나 취하도록 마신다고 했다. 부친이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평소에도 태평양전쟁 때의 경험은 물론 한국을 좋게 보는 얘기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는 나와도 처음 만난 사람 같지 않게 스스럼 없이 즐겁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사진 몇 장 찍고 금방 일어선다는 게 오히려 그의 말이 길어지는 바람에 한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밖은 이미 밤이었다. 대문까지 나와 돌아서는 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그에게 나도 가볍게 절을 하고 전차역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부록]

 

일본육군사관학교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 한국인 명단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 및 중퇴자 146명과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 41명의 기별 명단은 다음과 같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졸업생 41명 중 26명은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21명)

김규복(金奎福) 노백린(盧伯麟) 김교선(金敎先) 이기옥(李基鈺) 김성은(金成殷) 윤치성 임재덕(林在德) 어담(魚潭) 조택현(趙宅顯) 김형섭(金亨燮) 방영주(方泳柱) 김의선(金義善) 김홍남(金鴻南) 권호선(權浩善) 김관현(金寬鉉) 장홍익(張洪翼) 강용구(姜容九) 김홍진(金鴻鎭) 김봉석(金鳳錫) 장인근(張寅根) 권승록(權承祿)

 

제15기생(8명)

김응선(金應善) 김기원(金基元) 남기창(南基昌) 유동설(柳東說) 박영철(朴榮喆)  이갑(李甲) 박두영(朴斗榮) 전영헌(全永憲)

 

제23기생(1명)

김현충(金顯忠)

 

제26기생(15명)

홍사익(洪思翊) 이응준(李應俊) 유승렬(劉升烈) 안병범(安秉範) 신태영(申泰英) 

이대영(李大永) 박승훈(朴勝薰) 김준원(金埈元) 염창섭(廉昌燮) 권영한(權寧漢) 조철호(趙喆鎬) 민덕호(閔德鎬) 지청천(池靑天) 남상필(南相弼, 중앙유년학교중퇴) 이은우(李殷雨, 중앙유년학교중퇴)

 

제27기생(25명)

김석원(金錫源) 백홍석(白洪錫) 김인욱(金仁旭) 정훈(鄭勳) 남우현(南宇鉉) 윤상필(尹相弼) 장석윤(張錫倫) 김중규(金重圭) 이강우(李降宇) 이희겸(李喜謙) 서연필(徐延弼) 장기형(張璣衡) 장유근(張裕根) 이종혁(李鐘赫) 김종식(金鐘植) 이동훈(李東勛) 장성환(張星煥) 유관희(柳寬熙) 원용국(元容國) 박창하(朴昌夏) 민병은(閔丙殷, 중퇴) 이교석(李敎奭, 중퇴) 강우영(姜友永, 중퇴) 유춘형(柳春馨, 중퇴) 갑우현(甲佑鉉, 중퇴)

 

제29기생(2명)

이은(李垠, 영친왕) 조대호(趙大鎬) 

 

제30기생(1명)

엄주명(嚴柱明)

 

제42기생(1명)

이건(李鍵, 의친왕 이강의 장남)

 

제45기생(2명)

이우(李우, 의친왕 이강의 차남) 이형석(李炯錫)

 

제48기생(1명)

유원식(柳原植)

 

제49기생(2명)

이종찬(李鍾贊) 채병덕(蔡秉德)

 

제50기생(2명)

이용문(李龍文) 지인태(池麟泰)

 

제52기생(2명)

최명하(崔鳴夏) 박범집(朴範集)

 

제53기생(2명)

신응균(申應均) 박재흥(朴在興)

 

제54기생(3명)

김정렬(金貞烈) 강석호(姜錫祜) 노태순(盧泰順)

 

제55기생(5명)

유재흥(劉載興) 김창규(金昌圭) 전원상(田源上) 정일권(丁一權) 김석범(金錫範)

 

제56기생(10명) 이형근(李亨根) 최창식(崔昌植) 최정근(崔貞根) 김종석(金鍾碩) 이주일(李周一) 박임항(朴林恒) 최창언(崔昌彦) 김민규(金敏奎) 최창륜(崔昌崙)

조영원(趙永遠)

 

제57기생(7명)

김영수(金泳秀) 김호량(金鎬梁) 정상수(鄭祥秀) 박정희(朴正熙) 이한림(李翰林) 이섭준(李燮俊) 김재풍(金在豊)

 

제58기생(8명)

정래혁(丁來赫) 박원석(朴元錫) 신상철(申尙澈) 안광수(安光銖) 한용현(韓鏞顯)최복수(崔福洙) 최주종(崔周鍾) 강태민(姜泰敏) 

 

제59기생(7명)

장창국(張昌國) 홍승화(洪承華) 김광수웅(金光秀雄, 본명불명) 강문봉(姜文奉) 황택림(黃澤林) 이용술(李容述) 김태종(金泰鍾)

 

제60기생(13명)

장지랑(張志良) 이연수(李連洙) 조병건(趙炳乾) 김태성(金泰星) 이성구(李成九) 이재익(李在鎰) 김윤근(金潤根) 김세현(金世鉉) 정정순(鄭正淳) 김학림(金鶴林) 김기준(金基濬) 김석권(金錫權) 이우춘(李遇春)

 

제61기생(8명)

정만영(鄭萬永) 조병하(趙炳夏) 김은수(金銀銖) 김차경(金次經) 최용기(崔鎔基) 김중환(金仲煥) 조철형(趙哲衡) 오일균(吳一均)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제1기생(11명)

박임항(朴林恒, 수석졸업) 이주일(李周一) 최창언(崔昌彦) 최창륜(崔昌崙) 김민규(金敏奎) 조영원(趙永遠) 김동하(金東河) 김영택(金永澤) 윤태일(尹泰日) 방원철(方円哲) 이기건(李奇建)

 

제2기생(10명)

박정희(朴正熙, 수석) 이한림(李翰林) 이섭준(李燮俊) 김재풍(金在豊) 이재기(李再起) 김묵(金默) 안영길(安永吉) 강창선(姜昌善) 이상진(李尙鎭) 이병주(李炳胄)

 

제3기생(2명)

최주종(崔周種) 강태민(姜泰敏) 

 

제4기생(2명)

장은산(張銀山, 수석) 예관수(芮琯壽)

 

제5기생(4명)

강문봉(姜文奉) 황택림(黃澤林) 이용술(李容述) 김태종(金泰種)

 

제6기생(11명)

김윤근(金潤根) 김세현(金世鉉) 정정순(鄭正淳) 김석권(金錫權) 이우춘(李遇春) 김학림(金鶴林) 김기준(金基濬) 박승환(朴承煥) 김동훈(金東勳) 육굉수(陸宏修) 신원(新原)

 

제7기생(1명)

김광식(金光植)

 

 

이곡 권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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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육군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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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당시의 일본육군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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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후의 박정희(태평양전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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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중인 조선인 일본육군 지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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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인이 된 이 왕가 후손(좌 이은, 중앙 이건, 우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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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옷을 입은 홍사익 일본군육군중장과 그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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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실시를 위한 조선총독부 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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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실시에 관한 대구지방법원 공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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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에 대한 일본육군 지원병령(조선총독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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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으로 전향한 이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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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해방 후 중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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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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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특공대에 징발된 조선인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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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왕자의 일본 도쿄저택(아카사카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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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일본육사 동기생 호리구치 도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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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구치가의 금붕어양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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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들이 사용한 수통(호리구치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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